“1919년, 드디어 조선 민족은 거대한 함성을 터뜨립니다.
나라 잃은 지 9년 만에 전국 방방곡곡이 하나로 일어선 3·1운동.
그 불길은 만주와 연해주, 미주와 상해까지 번지며 독립전쟁의 서막을 알립니다.
1. 1919년, 3·1운동의 불꽃
●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 대통령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웠습니다.
● 이 소식은 조선 지식인들과 학생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죠.
● 1919년 1월, 고종 황제가 급서하자, 백성들 사이에서 “독살설”까지 퍼지며 민심이 술렁였습니다.
● 바로 그해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
● 탑골공원에는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 이 시위는 전국으로 번져, 2개월 동안 무려 2백만 명 이상이 참여했습니다.
📌 주요 인물: 민족대표 33인(손병희, 이승훈, 최린 등), 학생 대표(정재용, 이종일)
2. 일제의 탄압과 잔혹한 진압
● 하지만 일본은 곤봉과 총칼로 시위를 무참히 진압했습니다.
● 특히 제암리 학살 사건은 그 잔혹성을 보여줍니다.
● 교회에 주민들을 몰아넣고 불을 질러 학살했던 사건은 세계 언론에까지 알려졌습니다.
● 3·1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민족에게는 ‘우리가 함께 일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3. 해외 주요 정부 수립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 3·1운동 이후, 해외 독립운동가들은 다시 모여 새로운 길을 모색했습니다.
●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됩니다.
● 임시 대통령에는 이승만, 국무총리에는 이동휘, 외교·군사·재정 각 부처가 꾸려졌습니다.
● 비록 내부 이념 갈등(민족주의 vs 사회주의)은 있었지만, 임시정부는 이후 26년간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합니다.
✅러시아 연해주 지역 주요 단체들
1.대한국민의회 (1919, 블라디보스토크)
● 3·1운동 직후 세워진 정부 성격의 조직.
● 입법·사법·행정 삼권을 갖춘 독립운동 단체로, 스스로를 "임시정부"라 주장함.
● 지도자: 손병희, 이동휘, 이승만 계열과도 연계되었지만 주도는 연해주 독립운동가들.
● 특징: 상하이 임시정부와 비슷하게 "정부"를 표방하면서도 따로 움직여 갈등을 빚음.
2.전로한족회중앙총회 (1917~1919)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사회를 대표한 단체.
● 초기에는 교민 보호 성격이 강했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무장투쟁과 독립운동을 적극 추진.
● 이 단체를 기반으로 대한국민의회가 만들어짐.
● 주요인물(문창범,이동휘,최재형,박은식,윤해,김하석,장기영)
3.한인사회당 (1918, 이르쿠츠크)
● 고려인 출신 이동휘,김립가 중심이 된 사회주의 성향 단체.
●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에 영향을 받아, ‘무장혁명’과 ‘사회주의 조선’을 주장.
● 특징: 후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 "사회주의 세력"의 대표로 참여.
4.성명회 (1910년대 후반, 연해주)
● 연해주 독립운동 단체 중 하나로, 무장 독립전쟁을 강조.
● 후에 대한국민의회 등과 합류하거나 흡수됨.
⚡ 주요 갈등
상하이 임시정부 vs 대한국민의회
● 모두 "임시정부"를 표방했기 때문에 누가 진짜 합법정부인가를 두고 갈등.
● 상하이는 해외 교포 중심, 외교 독립론에 강했음.
● 연해주는 무장투쟁 중심, 현실적 무력 독립을 강조.
● 결국 세력 분열로 국제사회에 독립운동의 목소리를 통일시키는 데 한계.
민족주의 vs 사회주의 갈등
● 민족주의 계열: 김구, 안창호, 이승만 등 → 외교활동, 민족 계몽, 무장투쟁 병행.
● 사회주의 계열: 이동휘, 한인사회당 → 소련과 연계해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독립 주장.
● 이 대립이 커지며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이어짐.
(독립군이 소련 적군과 충돌하면서 대규모 희생 발생)
군사 지휘권 갈등
홍범도, 김좌진, 최진동 등 여러 지휘관이 있었지만,
각 부대 간 통합된 지휘체계가 없어 연합은 잠시뿐이고 곧 분열.
● 예: 봉오동·청산리 전투 이후 독립군이 러시아로 이동했을 때, 지휘권 통일 문제로 충돌.
● 그 결과 자유시 참변 같은 비극이 발생했고, 독립운동의 힘이 분산되는 한계로 이어지게 됩니다.
4. 무장독립운동의 본격화
● 1919년 이후, 독립운동은 무장 투쟁으로 방향을 틉니다.
● 만주와 연해주 곳곳에서 독립군 부대가 조직되었고,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중추적 역할을 했습니다.
●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등 걸출한 지휘관들이 등장했습니다.
5. 1920년, 봉오동 전투
● 1920년 6월, 독립군은 압록강을 넘어오는 일본군을 맞아 싸웠습니다.
●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군대가 연합해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둡니다.
● 일본군 수백 명을 사살하고, 독립군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사건이었습니다.
● 이는 일제강점기 첫 번째 큰 승리로 기록됩니다.
📌 주요 인물: 홍범도, 최진동, 안무
6. 1920년, 청산리 대첩
● 봉오동 전투의 여세를 몰아, 같은 해 10월에는 청산리 대첩이 일어납니다.
●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의 연합군이 일본 정예부대를 맞아 싸웠습니다.
● 6일간 10여 차례 전투에서 수천 명의 일본군을 무찔렀습니다.
● 일본군은 보복으로 만주의 조선인 마을을 불태우고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지만,
● 청산리 승전은 독립군에게 “우리는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주요 인물: 김좌진, 홍범도, 지청천, 이범석
7. 자유시 참변과 독립군 분열
● 그러나 승리의 기운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 독립군 부대들은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했지만,
●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 간의 갈등이 격화되었습니다.
● 결국 1921년, 소련 적군에 의해 무장해제 당하면서 많은 독립군이 희생되는 자유시 참변이 발생했습니다.
● 이는 독립운동 세력에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 당시 러시아 상황
러시아 혁명 직후의 혼란기
●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레닌 중심의 공산혁명)이 일어나면서, 기존 황제 체제(차르)가 무너짐.
● 이후 러시아 전역은 볼셰비키(적군) vs 반볼셰비키(백군) 간의 내전에 휩싸여 있었음.
극동 연해주 지역의 혼란
● 연해주와 시베리아는 백군과 일본군이 활동하던 지역.
● 일본은 시베리아에 군대를 파견해 반(反)볼셰비키 세력(백군등)을 지원하면서 세력을 넓히려 했음.
● 볼셰비키는 일본군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 독립군과도 손잡으려 했지만, 동시에 무장 세력을 통제하려 했음.
⚔️ 왜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나?
1.독립군의 이동
●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 승리 이후, 일본군의 보복이 극심해짐.
● 일본군은 만주 마을을 불태우고 조선인 학살을 자행했음.
● 그래서 독립군 부대들은 러시아 영토 **자유시(Свободный, 스보보드니)**로 이동해 regroup 하려 했음.
2.사회주의 vs 민족주의 갈등
● 자유시에 모인 독립군 세력은 크게 둘로 나뉨.
● 민족주의 계열: 김좌진, 홍범도 등. 무장투쟁 중심.
● 사회주의 계열: 이동휘, 김립 등. 소련 공산당과 연계.
● 소련 적군(볼셰비키)은 “무기를 모두 우리에게 넘기고, 지휘 체계를 통합하라”고 요구.
● 민족주의 계열은 이에 반발. "독립군 무기를 왜 남의 나라 군대에 맡기느냐"는 입장이었음.
3.무장해제 시도와 충돌
● 1921년 6월, 소련 적군이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의 무기를 강제로 회수하려 함.
● 그 과정에서 민족주의 계열과 충돌 발생.
● 이때 수백 명의 독립군이 사살되거나 포로가 되었고, 많은 병력이 해산됨.
● 이 사건이 바로 자유시 참변.
📌 결과와 영향
● 독립군은 큰 전력 손실을 입고,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독립운동은 크게 약화됨.
● 살아남은 일부는 다시 만주로 돌아갔고, 일부는 소련 적군에 편입되어 활동.
● 이후 무장 독립운동은 소규모 게릴라전, 의열단의 도시 폭탄 투쟁 등으로 방향을 바꾸게 됨.
● 자유시 참변은 독립운동사에서 내분과 국제정세의 틈바구니에 희생된 비극적 사건으로 남음.
👉 정리하면,
● 당시 러시아는 혁명 직후 내전 상태였고,
● 소련은 조선 독립군을 통제 가능한 혁명군으로 흡수하려 했음.
● 하지만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갈등 속에서, 강제 무장해제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나 자유시 참변이 벌어진 겁니다.
8. 인물들의 행보와 대립
● 김구: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재정비하며 조직 결속에 힘씀.
● 이승만: 미국 중심의 외교 독립론을 주장했지만, 임정 내부 반발로 탄핵됨.
● 홍범도: 카자흐스탄으로 이주, 평생 귀환하지 못함.
● 김좌진: 청산리 전투 이후에도 군사활동 지속, 훗날 암살당함.
● 안창호: 교육·계몽 중심 노선으로 청년 조직화.
이처럼 독립운동 진영은 서로 다른 노선을 걷기도 했지만, 모두 조선의 독립을 향해 치열하게 달려갔습니다.
1919년에서 1920년대 초반은
민족의 거대한 외침, 3·1운동으로 시작해
봉오동과 청산리의 승리로 이어졌습니다.
비록 자유시 참변과 분열이라는 시련도 있었지만,
이 시기 독립군과 임시정부는 ‘조선 독립’이라는 꿈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선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을 살펴보겠습니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측천무후 이야기ㅡ (3) | 2025.09.13 |
---|---|
1900년대초, 나라를 빼앗긴 조선과 세계사의 흐름(1) (8) | 2025.09.01 |
망국(2) 1910년 8월29일 대한제국 결국 일본에게 강제합병 (6) | 2025.08.14 |
역사상 가장 무의미했던 전쟁 TOP6 (1) | 2025.07.24 |
쫄딱 망한 '정부정책 TOP 6' (4) | 2025.07.1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