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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정주영의 파란만장한 인생

by 언빈 2025.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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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권력에 맞서다:88 올림픽부터 대선 도전까지, 한 기업가의 파란만장한 정치 도전기

현대그룹의 창업주 정주영 회장. 그는 한국 경제 성장의 상징이었지만, 동시에 권력의 정점에서 가장 격렬하게 맞섰던 기업가이기도 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수혜자에서 전두환 정권의 저항자로,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야망을 걸고 대선에 뛰어들기까지, 그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정경 관계를 포스팅해봤습니다.

1. 박정희 시대: 댐 건설로 맺은 '신뢰'의 시작

정주영 회장은 박정희 정권 하에서 국가적 토목 사업을 통해 입지를 다졌습니다. 특히 소양강댐 건설 과정은 권력과 기업가 정신이 충돌하고 화해하는 드라마틱한 순간이었습니다.정주영의 뚝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이 일화는, 그가 단순한 건설사가 아님을 증명했습니다. 

1964년 현대시멘트 준공식에서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부인 변중석씨. 박정희(가운데) <출처:현대자동차그룹>

소양강댐 건설 발주 (1967년):박정희 정부는 수력 발전을 위해 댐 건설을 지시했으나,

일본 공영에 맡긴 설계는 철근 콘크리트 구조를 요구했습니다.

    ● 당시 포항제철이 없던 상황에서 철근 수입은 막대한 비용을 발생시켜 현대건설의 파산을 의미했습니다.

 

정주영의 반기: 그는 태국에서 모래와 자갈로 댐을 만든 사례를 참고하여, 현지 자재를 활용한 '사력댐' 건설을 주장했습니다.

   ● 일본 공영과 건설부는 정 회장의 주장을 일축하며 그를 '초졸' 취급했습니다.

 

박정희의 결단: 이 갈등이 청와대에 보고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포병 출신으로서 군사적 관점에서 사력댐의 필요성을 간파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의 지지로 사력댐 건설이 확정되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정주영은 박정희 정권의 신임을 얻으며 경부고   속도로 등 주요 토목 공사를 수주했습니다.

1972년 소양강댐 담수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출처: 국가기록원)

2. 전두환 정권: '재벌 통합' 시도와 정면충돌

박정희 시대의 수혜자였던 정주영은 신군부 등장 이후 혹독한 시련을 겪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정권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정적 제거와 언론 통폐합에 이어 재벌 통폐합을 시도했고, 이는 정주영의 정면 반발을 샀습니다.

 

재벌 통폐합 시도: 전두환 정권은 재벌들에게 자동차와 중공업 중 하나를 포기하라고 압박했습니다.

대우의 김우중 회장은 순순히 응했지만, 정주영은 "우리나라가 사회주의도 아닌데 왜 기업까지 손대냐"며 거부했습니다.

강압적 압박: 국보위는 정 회장에게 이병철 회장이 TVC를 넘긴 선례를 들며 압박했고, 끝내 현대양행(발전기 제조)을 대우에 넘기는 굴욕적인 딜을 강요당했습니다.

정 회장은 김우중 회장을 '머리만 돌려 기업을 키운 자'라 비난하며 불신을 드러냈습니다.

발전기를 넘기고 자동차를 선택한 정주영회장의 뚝심

3. 88 서울 올림픽: 망신을 기회로 바꾼 승부사

정권의 압박 속에서도 정주영은 국가적 과제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질 것이라 예상했던 88 서울 올림픽 유치전에서 그는 '총알받이' 역할을 자처하며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유치위원장 수락: 정권은 올림픽 유치 실패의 책임을 정주영에게 씌우려 했으나, 그는 이를 기회로 삼았습니다.

전 세계를 향한 공세: 그는 전 세계 IOC 위원들을 상대로 전방위적인 로비를 펼쳤습니다.

             ● 일본 나고야 측이 세이코 시계를 선물할 때, 현대 측은 돈이 부족했으나 대신 매일 아침 IOC 위원 부인들에게 장미꽃을                    보냈습니다.

기적적인 유치 성공: 결국 서울이 88년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었고, 이 성공은 한국 스포츠 역사의 도약대가 되었습니다.

대한체육회장 축출: 그러나 정권은 올림픽 성공 직후인 1986년, 노태우에게 자리를 넘기기 위해 정 회장을 대한체육회장직에서 강제로 물러나게 했습니다.

이때 정 회장은 "이용만 당하고 언제까지 슈퍼 을로 살아야 하느냐"며 정치에 대한 결심을 굳혔습니다.

1982년 강남구 삼성동. 서울종합운동장 건설현장

4. 통일국민당 창당과 대선 도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자, 정주영은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본격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1992년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합니다.

 

정권과의 재충돌: 노태우 정권은 재벌들의 비자금 투기를 막기 위해 금융실명제 도입을 시도했으나, 재벌 총수들의 반발에 부딪혔습니다.

   ● 술자리에서 구자경 LG 회장 등이 노골적으로 정부 개입을 비난하자, 노태우 대통령은 분노하여 자리를 박차고 나갔습니다.

 

정주영의 불복종: 다른 회장들이 사과할 때, 정 회장은 끝내 사과를 거부했습니다.

   ● 이에 노태우 정권은 현대에 1,361억 원의 세무조사를 단행했습니다.

 

대선 출마 선언: 정 회장은 세금을 내는 대신, "그 돈으로 내가 대통령이 되겠다"며 자신의 자서전 제목처럼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를 실천했습니다.

   ● 그는 반값 아파트, 경부고속도로 2층 건설 등을 공약하며 돌풍을 일으켰고, 통일국민당은 31석을 확보하며 원내 교섭 단체가 되었습니다.

5. 초원복국 사건과 씁쓸한 퇴장

부산 대연동 초원복국 전경

대선 직전, 정주영 캠프가 저지른 도청 사건은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습니다.

 

결정적 실수: 대선 3일 전, 통일국민당이 부산의 초원복국집에서 벌어진 지역 감정 조장 대화를 도청하고 이를 언론에 뿌렸습니다.

    이 사건은 지역 감정 조장이라는 비판보다 '도청'이라는 행위 자체로 프레임이 전환되며 역풍을 맞았습니다.

 

선거 결과와 후폭풍: 이 역풍으로 인해 대구/경북 지역에서 김영삼 후보가 치고 올라갔고, 결국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었습니다.

1992년 제14대 대선은 민자당 김영삼, 민주당 김대중, 통일국민당 정주영 3자구도로 펼쳐졌다

당선된 김영삼 대통령은 복수의 화신처럼 현대그룹에 대한 대출을 끊어내는 등 강력한 보복 조치를 취했습니다.

 

정치 인생의 오점: 정주영은 이후에도 대선 재도전을 시도했으나 아들 정몽헌 회장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결국 그의 정치 도전은 기업가로서의 성공 신화에 가려진 인생의 가장 큰 오점으로 남았으며, "정치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평가로 마무리됩니다.

 

정주영의 파란만장했던 정치 여정은 권력과 자본이 얽힐 때 발생하는 필연적인 갈등과, 한 기업가가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려 했던 끈질긴 투쟁의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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