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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일제강점기 존경받아야할 의사 세분 / 백인제 , 김필순, 이태준

by 언빈 2025.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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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독립을위해 싸우신 독립투사들을 우리가 어느정도 알고있지만

존경받을만한 의료인에대해선 생소할겁니다.

그래서 이번 포스팅은 일제강점기때 약자와 독립을위해 애쓰신 대표적 의료인

세분을 포스팅 하겠습니다.

 

백인제

백인제 선생님은 1899년생이고 백병원의 설립자이자 인제대학교도 이분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습니다.

백인제(1899~1953)

금수저 of 금수저 백인제선생

이분이 정말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냐면 정말 금수저중의 금수저로 태어났습니다.

오산학교라는 나름 신식학교를 다닐때 수석을 놓친적이 없을만큼 머리도 좋았구요.

또한 지금의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의학 전문학교에 1회생으로 입학 해서도

한 번도 수석을 놓치지않고 계속 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가 3학년시절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그도 이 운동에 참여를 합니다.

단순참여가 아니라 주동자로서 그는 학교에서 퇴학을 당합니다.

그의 집안이 부자라서 그런진 몰라도 1920년 그는 다행히도 4학년으로 복학을 합니다.

하지만 3.1운동에 가담한죄로 졸업해도 의사면허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이에 강력항의하자 조선총독부에선 총독부병원에서 2년동안 마취기술을 

열심히 배우면 그후에 의사면허를 주기로 약속합니다.

마취기술을 열심히 배운후 2년후 의사면허를 받고 백인제 외과의원을 엽니다.

광복후 많은돈을 사회에환원

그리고 돈은 어느정도 받았지만 거의 무상으로 치료를 해주고 

1945년 광복이 되자마자 1946년도에 지금까지 번 돌을 싹 다 사회에 환원을합니다.

정말 대단하네요. 저같이 평범한 사람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죠.

비참한말년

하지만 백인제 선생님의 출생연도는 알지만 그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에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6.25전쟁때 피난을 못가고 납북이되서 반동으로 낙인찍혀 수용소에서 수감되어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셨다고 합니다.

김필순

두번째로 소개해 드릴 분은 김필순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사 면허를 가지신 분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료기관은 서양 선교사가 만든 '제중원'이라는 곳입니다.

제중원

 

제중원은 나중에 '세브란스'라는 이름으로 바뀝니다. 

여기 1호 입학생이 김필순입니다.

만주에서 찍은 김필순의 가족사진 (1878~1919)

 

서울시가전의 발발

그런데 1907년 8월1일 일제가 순종의 명의로 대한제국 군인들을 서울 동대문 훈련원에 

모이게한 뒤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총기를 압수시키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분을 못참고 박승환 참령은 다음과같은 유서를 남기고 1907년 8월1일권총으로 자결합니다.

박승환참령
박승환유서

 

이에 부하들이 울면서 반납했던 무기를 다시 찾고 일제강점기 최초의 서울시내 교전을 남대문에서 벌어집니다.

남대문 빌딩위에서 일본군의 기관총 난사로인해 많은 대한제국군 사상자가 생겼구요.

이 시가전은 대한제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서울시내 시가전입니다.

안창호와의 만남

이때 아직은 의사면허를 못딴 의대생 신분의 김필순이

이 병원으로 실려온 대한제국군들을 살려내기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합니다.

이런 김필순의 모습을 하와이에서 막 한국으로 왔던 도산 안창호선생의 눈여겨 봅니다.

 

미침 둘은 1887년생 동갑이었고 안창호는 자신이 조직한 '신민회'에 들어올것을 

김필순에게 권유하고 둘은 친해집니다.

1908년 정식으로 김필순은 세브란스에서 정식 의사면허증을 땁니다.

 

하지만 1911년 '신민회'와 '기독교도'들의 주도신문화운동을 통한 민족독립운동이 뿌리 깊게 전파되고 있을때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잡힌 안명근 사건(安明根事件)을 일제가 확대 · 날조해서 수많은 신민회 회원을 잡아 고문하고

105명이 재판을 받게되는데 이것이 '105인사건'입니다.

만주로도피

'105인사건' 에 안창호 선생과 김필순도 연루가돼서 김필순은 세브란스 병원에서 

급히 서울역으로가 만주로가는 기차를타고 만주로 갑니다.

만주에서도 의술 활동을 펼치는데 여기서 번돈을 

중국에있는 독립 투사들에게 다 독립자금으로 넘깁니다.

비참한말년

하지만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 일본인 밀정이 건넨 독이든 우유를 마시고

그자리에서 쓰러져 돌아가십니다.

너무나도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셨는데요.

왜? 이렇게 훌륭한 분들은 거의다 비참한 생을 마감하는지 좀 슬프네요.

 

이태준

이태준 선생은 세브란스 의대 2회 졸업생이고 위의 김필순 선생의 직속 후배입니다.

이태준(1883~1921)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출처:독립기념관)

 

김필순의 후배 이태준

김필순 선생을 만주로 피신시키기위해 서울역에 같이가고 자신은 세브란스병원으로 돌와았는데

동료들이 이태준 선생도 검거대상이라 말하자 자신도 서울역으로 다시가서 

자신도 만주로 간후 몽골로 갔습니다.

 

그이유는 그당시 서구열강중 대한조선이 식민화 됐다는것에

관심있는 나라는 단 한나라도 없었습니다. 

대신 러시아 즉 그당시 소련만 관심을 가져줬는데요.

몽골에서의 의료활동및 독립자금전달

소련 자체가 제국주의 타파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가된 

대한제국에게 독립자금을 제공하겠다고 합니다. 실제로 많은 지원도 해주었구요.

이태준 선생은 소련측에게서 금괴를 받기위해 몽골로 갑니다.

금괴도 소련측으로부터 받았구요.

소련 '왕정파'에의한 교수형

그런데 그당시 소련은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나서 레닌의 승리로 '왕정파 우익'들이 

몽골로 피신해서 옵니다.

피신해서 몽골쪽으로온 이 소련 왕정파 우익들이 이태준선생의 집으로 급습했는데

그만 여기서 금괴를 발견하고 이태준 선생을 추궁 했는데  이금괴를 소련 레닌측으로부터

받았다고 사실대로 얘기합니다.

 

가뜩이나 레닌때문에 몽골로 피신한 왕정파들은 그 금괴를 레닌측으로부터 받았다고하니 

몽골 한가운데서 이태준 선생을 교수형을 해버립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백인제, 김필순,이태준같은 의사선생님들은 너무 훌륭한 분들인데

비참한 최후를 맞아서 참 서글프고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됩니다.

착한 사람들이 잘 사는 세상은 정말 힘든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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