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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마지막 죽음과정까지 최선을 다했던 전봉준장군

by 언빈 2024.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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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장군으로 잘 알려진 전봉준장군. 하지만 전봉준 장군이 재판을받고 사형선고를 받고 죽었다는 사실은 잘 모르실겁니다.

자기가 재판에서 사형당할걸 알면서도 동학혁명의 전봉준장군은 왜 일본놈들에게 재판을 받았을까요?

제1차 동학혁명

동학혁명은 1894년 1월 조병갑의 탐압및 횡포때문에 '제폭구민' ,폭정을 없애고 백성들을 구한다라는 기치아래 일어났습니다.

조병갑이라고 잘못알려진 조병갑의 사촌형 조병식<출처:나무위키>

 

그 혁명의 분위기가 들불처럼 타올라 5월달에는 전주성까지 점령을 합니다.

 

거의 무혈입성에 가까웠는데요. 호남의 심장이었던 전주성이 함락되자 멍청한 고종이 하지말아야할 선택을 합니다.

청나라에게 sos를 친겁니다. 정말 최악이죠.

청나라에게 요청을 했는데 '텐진조약'에 따르면 청나라와 일본은 서로 조선에 파병을 할 때 미리 알려주어야 된다라는 조약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일본은 청나라의 파병소식을 듣고 한반도 내에 일본인을 구한다는 구실로 또 역시 군대를 판견합니다.

그러면서 청일전쟁으로 까지 촉발되구요.

청일전쟁 과정에서 일본군은 경복궁울 침탈하고 이 과정에서 고종은 포로와 같은 대접을 받습니다.

김홍집을 중심으로 친일 내각이 성립되구요.

<출처: 다음백과>

제2차 동학혁명

고종이 잡혀있고 일본이 우리를 침탈한다고 본 전봉준장군은 '척양척왜'( 서양과 왜의 문물이나 세력 따위를 거부하여 물리침)의 기치아래  제2차 동학혁명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잘알려진 '우금치'전투에서 패퇴하면서 수만 명의 농민군이 학살당하다시피 전사를합니다.

<출처:나무위키>

전봉준장군은 피신을하고 옛 동료였던 김개남을 만나러 가는 도중에 김경천의 밀고로 잡히게 됩니다.

정해진 재판의시작 / 일본보다 더 나쁜 한국인

그리고 1895년 1월부터 재판이 시작되는데 당시 재판장은 '서광범'이라는 인물이었지만 일본의 '이노우에 가오루라'는 일본공사가 주관을 하고 '우찌다 영사'가 현장에 참여하면서 재판을 이끌어 갔습니다.

 

그 당시 법무대신 서광범(1859~1897)은 1884년 갑신정변의 주모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실패 후 일본으로 도망갔고 조선 정부의 송환 독촉에 아예 미국으로 달아나 망명을 해버린 인물입니다.

이노우에는 동학운동을 엄청싫어했지만 감옥에있던 전봉준에 감동받아 나중에 구명을 했다고하네요.

오히려 서광범과 박영효등이 정적제거를위해 사형을 주도했다고 합니다.

보빙사로 미국을 방문할시기 서광범(1883년) / 앞줄 왼쪽부터 부공사 홍영식(28), 전권대식 민영익(23세), 종사관 서광범(23세)

 

무려 신문한 조선 사람이 61명이고 일본영사관 측에서 무려 1500권의 서류를 검토했다라는 문서가 일본 측에서 나왔다고 하는데요. 이 재판은 사실 재판장은 서광범이지만 일본공사가 주관을 했다고 볼 수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치욕스런 재판을 받은 이유는 전봉준 장군은 의미가 있다고 봤습니다.

 

이 재판 과정이 기록으로서 남아 후세에 알릴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죠.

결국 재판 기록이 굉장히 많이 남아있는데 만약에 전봉준 장군이 재판을 받지 않고 현장에서 죽었다면

그러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을겁니다.

 

심문과정에서 "왜 일본에 대항하려고 하느냐? 미국도 있고 프랑스도 있고 영국도있고 러시아도 있는데 왜 일본군에 대항을 하려고 하느냐?" 그러니까 전봉준장군은 "그들은 통상을위해 온거같다 그래서 어떤 목적이 이루어지면은 군대를 물렸다" 그런데 일본군은 군대를 물리지 않고 심지어 경복궁을 침탈해서 고종까지 겁박을했다. 이게 침략의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며 그러면 백성된 처지에서 어떻게 가만 볼 수있느냐?"라는 말을 재판과정에서 했다고 합니다.

공초 기록에 지금 그대로 남아 있게 된거죠.

 

또한 "만약에 이게 성공했으면 어떡하려고 했느냐?"는 질문을 받자"왜적이 물러났는데 내가 여기서 뭘 할 일이 있느냐 나는 다시 농사를 지으로 가려고 했는데 그것이 되지 못해서 안타까울 뿐이다"라고 이 공초기록에 남아있습니다.

이 재판 과정은 굉장히 굴욕적일 수 있었지만 전봉준 장군은 이 혁명의 정당한 취지라든지 자신이 생각했던 것들을 얘기할 수 있었던겁니다.

 

 

위 사진은 국사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굉장히 유명하면서도 전봉준장군의 유일한 사진입니다.

'압송당하는 전봉준장군'으로 일반 책에서 설명이 되있는데 잘못된 설명입니다.

이 사진은 지금의 을지로에서 종각을 왔다갔다 하면서 재판을 받으러 가는 전봉준장군의 사진입니다.

일본 기자가 찍은 사진인데 기자는 "전봉준 장군에게 찍어도 돼냐?"고 물었고 전봉준장군도 흔쾌히 허락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봉준 장군은 정면을 똑바로 응시한 채 찍습니다.

전봉준 장군은 자신의 얼굴을 정확하게 후세에 남기고 싶었고 재판과정에서 결과와 상관없이

'나는 당당하다'는 모습을 보였주고 싶었습니다.

정면을 정확하게 응시하는 전봉준 장군의 눈매는 솔직히 좀 무섭기까지 합니다.

이 사진은 돌아가시기 며칠 전의 사진이라고 합니다 ㅠㅠ

 

1895년 3월29일 날 동료들 4명과 더불어서 사형선고를 받고 바로 다음날 30일 집행이 됩니다.

전봉준장군 판결선고서

왜이렇게 빨리 집행이 됐을까요?

바로 4월1일은 갑오개혁으로 새로운 형법이 시행되는데 사법제도가 1심 원칙에서 재심 구조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당대 사람들은 전봉준장군에게 "이노우공사를 만나라! 이토 히로부미의 친구이니 잘못했다고 하면 사형은 피할 수있다"라고했으나 "내가 그 사람한테 머리를 숙일거면 처음부터  이 일을 하지않았을 것이다"라고 했다네요.

 

마지막 자신의 죽음에 이르는 그 재판 과정까지 최선을 다해서 응했던 전봉준장군에게 정말 숙연해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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