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9월 어느날,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 정보국요원이 프랑스 주재 대일대사관 우편함에서 편지 한 장을 훔쳐냈습니다.
독일대사관 무관 '슈바르크코펜'앞으로 가는 봉투안에는 프랑스 육군 기밀문서의 내용을 자세히 적은 '명세서'가 들어 있었고 그것을 독일에 보낸 프랑스 첩자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 지나지않아 정보국의 수사관들은 범인을 잡았는데 그 범인이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fus)'였습니다.
단지 '명세서'의 글씨가 드레퓌스의 것과 비슷하다는 이유였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의 나라가 내전에 버금가는 혼란과 분열에 빠진 이사건은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드레퓌스가 범인으로 지목된 진짜이유
드레퓌스는 아주 평범한 육군 장교였습니다.
그는 진지하고 성실했지만 말이 적고 융통성이 모자란 편이어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별로없었고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놀림을 당하고 차별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조국에대한 사랑과 군대에 대한 충성심으로 어려움을 이겨내고 착실하게 생활해 나갔고 서른살 대위가 된 그는 같은 유태인인 '루시 아다마르'와 결혼했습니다.
사실 그가 범인으로 지목된 이유는 글씨보단 유태인이라는 이유가 더 컸습니다.
드레퓌스는 비공개 재판정에 섰지만 반유태주의 극우 신문들이 사건을 공개하라고 떠들고 온갖 뜬소문을 날마다 대문짝만하게 실었습니다. 재판을 받기도 전에 그는 반역죄인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1894년 12월 군사법원은 드레퓌스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습니다.
군부의 참모본부의 상관들은 증거를 제시하고 드레퓌스는 그 증거들에 반박할 기회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극우 신문들은 드레퓌스가 "프랑스를 파멸시키고 프랑스의 영토를 차지하려는 유태인 국제조직의 스파이"라고 까지 하면서 반드시 사형시켜야 한다고까지 했습니다.
물론 일부 언론인과 변호사들은 확실한 증거를 밝히라고 요구했지만 참모본부는 "확실한 증거는 국가안보를 위해서 공개할 수 없다"발표했습니다. "너무 중요한 군사기밀이기 때문에 만약 공개하면 독일과의 전쟁도 각오해야 한다"고 협박했습니다.
드레퓌스는 유죄 판결 뿐만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계급장을 뜯기고 군대에서 쫒겨나는 모욕까지 당해야 했습니다.
그런다음 아무도 모르게 아프리카 기이나의 적도 부근 외딴 섬으로 끌려갔고 거기서 적도의 무더위와 짐승 취급을 받으며 다섯해 가까운 세월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세상사람들은 드레퓌스라는 이름을 잊었고 아내 루시와 형 마티외 가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루시는 남편이 갇혀 있는 '악마섬'에서 살게 해 달라고 당국에 청원서를 냈습니다.
그러나 그마처 차갑게 거절당했습니다.
한줄기 희망이 보이다
그런데 재판이 끝난 지 열다섯 달이 지난 1896년 3월 드레퓌스의 앞날에 한 줄기 빛이 찾아 들었습니다.
참모본부 정보국에서 일하는 조르쥬 피카르 중령은 또 다른 스파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우연히 드레퓌스사건에 관한 서류를 읽어 보았습니다. 근데 뜻밖에도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하나는 드레퓌스 대위가 반역죄를 범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문제의 '명세서'글씨가 보병 대대장 에스테라지 소령의 글씨와 너무 똑같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이 놀라운 사실을 곧바로 상관에게 알리고, 에스테라지를 체포해서 재판을 다시 열자고 건의했습니다.
하지만 참모본부의 장군들은 자기네가 저지른 잘못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피카르 중령은 자신의 목숨도 위험하다고 느꼈지만 용기를 내어 어떤 변호사에게 이 사실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 변호사는 다시 언떤 국회의원에게 진실을 알렸구요.
하지만 그 두 사람은 유태인과 한통속이라고 사람들이 헐뜯을까 겁이나서 발표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런와중에 동생을 구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던 마티외는 한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성공합니다.
그는 "반역자 드레퓌스의 죄를 증명할 수 있는 뚜렷한 증거가 있다. 그런데도 그것을 밝히지 않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아직도 드레퓌스가 죄가 없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는 만큼, 지금이라도 그 증거를 공개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유태인 욕하고 헐뜯는 데 앞장섰던 신문 <르마텡>이 특종을 터트립니다.
어디선가 명세서 사본을 구해 큼직하게 실은 것입니다.
자기의 글씨가 신문에 나자 진짜범인 에스테라지 소령은 가만히 있을수 없었습니다. 그는 겉보기에는 제법 훌륭하게 장교 노릇을 했지만 실제로는 간첩행위를 하거나 돈 많은 과부를 꼬드겨 만든 돈으로 방탕하게 사는 비열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감추기위해 쉴 새 없이 새로운 음모를 꾸미고 참모본부 장교들도 진상을 알았지만 그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었습니다.
그러나 명세서의 글씨가 드레퓌스의 것과 다르다는 이야기는 꾸준히 퍼져 나갔습니다.
분열하는 프랑스
이때부터 신문을 통해 불꽃 튀는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대부분의 신문들은 "드레퓌스 재판을 다시하면 군부, 나아가 프랑스를 파멸하려는 유태인 국제조직이 꾸민 음모다"라며 참모본부의 편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흙탕물 속에서도 <피가로.라는 신문이 맨 처음으로 에스테라지가 진짜 범인이라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유태인 추방을 선동하는 신문들의 아우성에 맞서기에는 그 목소리는 너무나 가냘폈습니다.
군사법원은 재판을 열어 에스테라지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엉뚱하게도 변호사에게 "군사기밀을 누설했다"고 하여 피카르 중령이 체포됩니다.
온 세계의 내노라하는 신문들은 이 사실을 다투어 내보내고 이제 드레퓌스사건에대한 진실은 이제 어마어마하게 커져갑니다.
유럽의 많은 신문들이 프랑스를 조롱했고 민주주의와 지성의 나라임을 자랑삼던 프랑스는 이제 문명세계의 비웃음을 사는 처지가됐습니다.
뒷날 수상으로서 프랑스 국민을 이끌고 제1차 세계대전의 불바다를 헤쳐나간 호랑이 '클레망소'는 이러한 신문들을 일고 울음을 터뜨렸다고 합니다. 그는 정치가로서 드물게 드레퓌스를 옹호했습니다.
이제는 드레쉬스 재판을 다시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프랑스 국민은 두 패로 갈라섰습니다.
민주주의와 프랑스대혁명의 이념에 반대한 왕정복고주의자와 옛 귀족들, 드레퓌스를 감옥으로 보낸 군부, 유태인 박해에 앞장선 과격한 가톨릭 사제와 신도들, 보수적인 정치가들,군국주의자들, 그리고 이들을 지지한 신문들이 한결같이 "유태인 국제조직의 음모에 맞서 국가안보를 지키려면 군부의 위신을 높여야 한다"고 떠들며 재심 반대를 외쳤고 반면에 양심 곧은 지식인과 법률가들, 공화주의자와 진보적인 정치가들, 그리고 몇 안 되는 신문들만이 재심 요구파에 가담했습니다. 미국과 유럽의 지식인들도 이들을 지지했지만 재심요구파의 수와 힘은 여전히 미약했습니다.
대반전의 시작 위대한 프랑스 작가 '에밀졸라'
그런데 1898년 1월13일, 절망을 희망으로 뒤바꿔 놓은 큰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클레망소가 운영하던 신문 <로로르>에 프랑스가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인 에밀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는 글을 발표한 것입니다.
그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이 편지를 하룻밤 하루 낮, 그리고 또 하룻밤을 꼬박 새우며 썼습니다.
이편지에서 졸라는 에스테라지가 진범인 이유를 하나하나 밝힌다음, 드레퓌스를 죄인으로 만들어 참모본부의 잘못을 감추려 한 장군들과 엉터리 증언을 한 글씨 감정전문가, 드레퓌스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에스테라지에게 무죄를 선고한 군사재판을 무섭게 꾸짖었습니다.
한 사람의 글은 엄청난 힘을 발휘했고 보잘것없던 <로로르>는 이날 무려 30만 부가 팔렸습니다. 또한 미국 작가 마크트웨인은 <뉴욕헤럴드>에 "나는 졸라를 존경하고 깊은 찬사를 보낸다"는 내용의 기고문을 올렸습니다.
흥분한 군중은 졸라의 집에 몰려가 돌을 던졌습니다. 두 패로 갈라선 프랑스 사람들은 아에 생활을 내팽쳐 버렸습니다. 책도 않읽고 그 좋아하던 극장도 안갔습니다. 신문을 읽고 말다툼과 주먹다짐을 벌이는것이 생활이 됐습니다. 목숨을 걸고 결투를 하는 사람들까지 곳곳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런데도 법원은 군사법원을 중상모략 했다는 이유로 에밀졸라에게 징역형을 선고했습니다.
반유태주의자들의 표적이된 졸라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영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의외의 사건에서 진실이 밝혀지다
드레퓌스를 편든 정치인들은 대부분 선거에서 떨어지고 여전히 이 싸움에서 재심요구파의 힘은 보잘거 없었습니다.
사건이 이렇게 끝날것처럼 보였는데 1898년 8월30일 아무도 내다보지 못한 사건이 일어나 판세가 완전히 한방에 뒤집힙니다.
참모본부에 근무하는 '앙리 중령'이 면도칼로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한겁니다.
그는 진실을 파헤치던 피카르 중령을 감옥에 집어넣으려고 에스테라지와 짜고 여러 가지 문서를 날조한 인물이었는데 아무래도 양심의 가책 또는 진실이 두려워 그만 이런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러자 군국주의자와 반유태주의자의 영웅 에스테라지는 잽싸게 영국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는 영국의 어떤 출판사에서 많은 돈을 받고 자기 이야기를 책으로 써 냈는데, 자기는 상부의 명령을 따라 독일의 기밀을 캐내기 위해 독일 무관에게 접근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독일 쪽에서는 자기네를 위해 일하는 스파이로 알았지만, 사실은 프랑스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이중첩자 노릇을 했다는 것입니다.
참모본부의 장군들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언론도 이젠 참모본부를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재심반대파의 집단발작도 잦아들었고 누가 보아도 재심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1899년6월3일, 고등법원은 마침내 재판을 다시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다시 재판정에 선 드레퓌스
드레퓌스는 악마섬에서 여태까지 자신을 둘러싼 이러한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또한 하나도 알수가 없었습니다.
어쨌든 드레퓌스는 재판에 다시섰고 에밀졸라도 망명 생활을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피카르 중령도 풀려났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참모본부의 상관들은 거짓말을 늘어놓았습니다.
재판 결과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일곱명의 재판관 가운데 두 명만이 드레퓌스 편에 섰기 때문입니다.
달라진건 "정상을 참작하여" 종신형 대신 십 년형을 내린 것 뿐이었습니다.
에밀졸라는 다신 펜을들었고 클레망소와 장 조레를 비롯한 프랑스의 양식 있는 정치가들은 정부를 공격해 댔습니다.
견딜 수 없게 된 대통령은 결국 1899년 9월19일 드레퓌스에게 특별사면을 내립니다. 자유를 되찾은 드레퓌슨는 그리던 아내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사면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자기의 죄를 인정해야 했습니다.
드레퓌스는 죄가 없음에도 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실을위해 다시 감옥에 갈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드레퓌스는 자기가 겪은 일을 쓴 <악마섬일기>를 펴내어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에밀 졸라도 <진실>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에밀졸라는 빼어난 글과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류의 양심'이라는 찬사와 존경을 받았지만 그는 정의가 이기는 끝을 보지 못하고 1902년 뜻밖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밤에 석탄난로 가스 때문에 영원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것입니다. 계획된 살인이라는 이야기도 떠돌았습니다.
드레퓌는스 1904년 3월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대법원은 1906년 7월12일 그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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