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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맨날 싸우는 이유(핵심요약)

by 언빈 2024.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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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이란 영화에서 보셨듯이 1972년 8월26일  제20회 올림픽이 서독의 뮌헨에서 화려하게 열렸습니다.

하지만 9월5일 검은 복면으로 감싼 무장 게릴라에의해 이스라엘 선수 둘이 사살되고 아홉명이

인질로 잡혔습니다. 이 광경을 세계 각국의 국민들이 tv를 통해 생생히 봤는데요.

이 게릴라는 '검은 9월단'이라는 가장 과격한 팔레스타인 게릴라 조직입니다.

뮌헨 올림픽 참사의 범인 중 하나인 '칼리드 자와드'

 

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원수지간이 됐을까요?

이스라엘 극우 '시온주의'의 등장

이스라엘의 건국과정부터 알아야되는데요.

이스라엘 건국을 가져온 것은 시온주의입니다.

공교롭게도  이 시온주의는 프랑스를 대혼란으로 몰아넣은 1896년 드레퓌스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스파이라는 누명을 받은 '드래퓌스'

드레퓌스를 비난하는 프랑스군중의 반유태주의 폭동에 놀라《유태국가 》라는 책을 집필한

'헤르즐'이라는 유태인 언론인이 있었습니다.

빈야민 제브 테오도르 헤르츨 / 시온주의 창시자

이책에서 그는 유태인들은 박해를피해 순수 유태국가를 세워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책이 '시온주의'의 기폭제가 된것입니다.

 

시온(Zion)은 유태교 성지 예루살렘에 있는 산의 이름인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천국, 이상향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시온주의자들은 민족적 전통에 비추어볼때 팔레스타인이야말로 가장 매력적인

약속의 땅으로 생각했습니다.

동유럽이나 러시아로 간 유태인들과 달리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 땅이 옛 조상들이

일궈놓은 땅이라며 팔레스타인으로 이민을 왔습니다.

 

시온주의 유태인들과 팔레스타인들의 위험한동거

그런데 시온주의자들은 그 당시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아랍계 주민들의 권리를 무시했습니다.

이는 당시 유럽인은 유럽 밖의 영토를 자기네 마음대로 점령하고 지배할 수 있는 '주인없는 땅'처럼 여기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들도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아랍 민족주의에

눈뜨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참을수 없었던 아랍민족역시 이민족 지배자에 대한 복수의 칼을 막 갈기 시작하던 때입니다.

이같은 사실을 시온주의자들은 인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름 1880년대까지는 두 민족이 평화롭게 어울려 살았습니다.

하제만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터키가 독일의 편을들자 팔레스타인 땅에는 일대 회오리가 일어났습니다.

영국은 1915년10월, 아랍인이 전쟁에 협력할 경우 전쟁이 끝나면 팔레스타인을

아랍인에게 넘겨 주겠다는 소위 '맥마흔 서한'을 발표합니다.

헨리 맥마흔 / 영국외교관

'벨푸어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을 배신한 영국

그런데 영국 외상 발포어는 1917년 미국 유태인의 협력을 얻어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려고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지지하는 '벨푸어선언'을 해버린겁니다.

이로써 아슬아슬하게 긴장을 유지하던 시온주의와 아랍민족주의 사이에 불씨는 

불꽃으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1917년 아서 벨푸어 영국 외무장관이 발표한 외교선언

 

영국이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자 아랍민족에 배신을 때린거죠.

통일 아랍국가는 커녕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가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은 영국이

신탁통치했습니다.

영국군의 비호를 받으며 이민을 계속한 유태인들은 1930년대 히틀러의 박해가 시작되자

홍수처럼 밀려들어 1936년에는 팔레스타인에 총인구 150만 가운데 28%인 43만명이

유태인 이었습니다.

 

우수한 기술과 자본으로 행정조직들을 건설하고 더욱이 과격 시온주의자들은 군대조직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아랍인들은 시온주의자와 영국 정부까지 공격을 가했는데요.

이에 골머리를 앓던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유태국가와 아랍국가로 분할하는 중재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태인이 이를거부하고 팔레스타인 전역이 다 유태민족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메시아 사상을 내세웠습니다.

녹색: 팔레스타인 / 흰색:이스라엘

전쟁터로 변한 팔레스타인

아랍 게릴라의 기습과 극우 시온주의 민병대의 잔혹한 보복공격이 반복되고 

팔레스타인은 전쟁터나 다름없었습니다.

특히 유태인 특공대가 한 아랍인 마을에서 254명의 남녀노소를 무차별 학살한

1948년 5월9일의 사태는 전 아랍민족의 가슴에 증오를 블러 일으켰습니다.

1948년 5월15일, 영국군은 두손다들고 골치아픈 땅 팔레스타인을 버리고 철수합니다.

그리고 같은날 시온주의 지도자 벤 구리온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포합니다

 

이는 아랍민족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습니다.

이집트,요르단등 아랍국가 연합군인 아랍 해방군이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어갔습니다.

드디어 제1차 중동전쟁이 터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수립

하지만 아랍해방군은 전투경험이 부족했고 장교들이 부패한 탓으로 군인들은

사기가 떨어졌습니다. 반면에 유태군대는 훈련이 잘 되고 사기가 높은데다

최신식무기와 군사전술로 모든 면에서 월등했습니다.

이에 휴전협정을 맺어 팔레스타인은 유태국가의 수립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스라엘과 주변국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 더 과격한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

요르단에 46만,이집트에 20만 레바논에 12만, 시리아에 8만등의 거의 100만 가까운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이스라엘을 저주했습니다.

1964년 1월에 열린 아랍 정상회담의 결정에 따라 같은 해 5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대표로하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출연합니다. 

PLO는 아랍 전역에 흩어진 난민들을 무장시켜 해방군을 조직했습니다.

바야흐로 주변 아랍국가들의 시혜와 힘에 의지하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영토를

되찾기 위해 총을 든 것입니다.

 

대부분 군주국가인 아랍나라들은 이스라엘과 정면충돌할까 두려워 PLO를 자기 영토 안에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고, 사회주의 국가들과 이집트, 시리아만이 PLO를 지원했습니다.

PLO의 온건노선에 반대하여 생겨난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는 시온주의자 뿐만아니라

제국주의에 봉사하는 아랍세계의 집권층, 미국까지 공격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  PFLP는 1970년9월에 일어난 뮌헨올림픽 선수촌 기습사건의 주인공들입니다.

 

68년 7월 팔레스타인 민족평의회는 '아라파트'를 제3대 PLO 의장으로 선출했고

1974년 11월13일 팔레스타인 게릴라 차림으로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유엔총회 연단에 오른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에서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호소하면서 유명한 연설을 합니다.

아라파트

 

아라파트 PLO의장과 이스라엘 라빈총리의 평화선언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1993년9월13일 아라파트는 미국 워싱턴 백악관 뜰에 나타나서

철천지 원수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과 화해의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아라파트는 전사의 무기를 버리고 '올리브가지'를 치켜 들었습니다.

1993년9월 이스라엘 라빈총리와 아라파트 PLO의장

 

아라파트는 '쓰디쓴 결단'을 내렸습니다. 

2천년전 조상들이 살았던 땅이라는 이유로 팔레스타인을 침략한 유태인들은 이 협정을 통해 

자기네가 세운 나라를 인정받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고향 땅 한 귀퉁이에서 자치정부를

세우도록 허락 받은것입니다"

이스라엘 점령지역인 가자지구와 예리코 시에서 팔레스타인 민족의 자치를 인정하는 평화회담에 서명한 것입니다.

상상도 할수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가자지구는 80만 명의 가난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몰려 살뿐만아니라

팔레스타인 민중봉기의 중심지임과 동시에 더 과격한 무장투쟁 조직들의 거점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곳에서 정착촌을 만든 유태인도 5천 명이나 되는 탓으로 팔레스타인 게릴라와

이스라엘 군대의 유혈충돌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자주 일어나 이스라엘 정부는 항상 골치를 썩고 있습니다.

 

아라파트는 "이 협정으로 계속된 고난과 괴로움이 끝나기를 진정으로 갈망하여 평화와 공존의 시대,

모두가 같은 권리를 누리는 새 시대가 열리기를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팔레스타인에 평화는 불가능할까?? 영원한 숙제

하지만 팔레스타인에 평화가 왔다고 장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땅에 얽힌 문제가 너무나 복잡하고 그동안 쌓인 원한이 너무 깊기 때문입니다.

가장 골치 아픈 장애물은 이스라엘의 과격 '시온주의 세력'과 팔레스타인 회교 원리주의 세력입니다.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등 급진파는 PLO와는 별도로 수천 명 규모의 게릴라 부대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서안지국 팔레스타인 정착촌에서 이스라엘 군인에게 돌을 던지며 반대 시위를하는 어린 소년을 체포한 이스라엘군

 

반면에 정착촌을 건설하면서 민병대를 만든 유태인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실제로 1994년 2월25일 새벽 요르단강 서쪽 헤브론의 한 이슬람 사원에서 

한 유태인 정착민이 예배를 보고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기관총을 마구 쏴서 50명이 넘게 죽고

수백 명이 다치는 대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극우 정치인으로서 본인,부인,아들등이 부패협의등으로

이스라엘내 낮은 지지율때문에 총리에서 물러나면 감옥에 갈 운명에 처해있었습니다.

'네타냐후' 현 이스라엘총리

 

그는 전쟁으로 이를 모면하고 있는것입니다. 전쟁중에 그를 파면시킬수는 없기 때문이죠.

그의 강경한 안보정책과 정착촌 확대 정책으로 팔레스타인 측의 큰 반발을 일으키고 있지만

이스라엘내에서는 지지율이 서서히 오르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다면 그는 부패혐의로 총리직에서 파면될 운명이지만 전쟁으로인해 총리직에서

연명을 하는 상황인거죠.

한 사람의 정치적 이익때문에 수천명이 죽는 전쟁이 계속 이어지는 이 현실이 계속되다니참으로 안탑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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