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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프랑스대혁명 이전과 그후 일어난 사건들 / 루이16세에서 나폴레옹까지

by 언빈 2024.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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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은 국민이 등을돌리면 통치자는 목이날라간다는 대표적 이야기입니다.

마리앙뜨와네트와 그의 남편 루이16세는 어떻게 몰락했을까요?

 

루이16세와 마리앙뜨와네트의 몰락

루이16세와 마리앙뜨와네트, 작가미상

튀르고의 개혁

당시 프랑스는 루이14와 15세의 실정으로 국가 예산의 60%이상이 돈을

원금도아닌 이자를 갚는데에 쓰이고 있었습니다.

이에 루이16세 즉위와 동시에 재정총감이 된 '튀르고'는 뼈를깍는 개혁을 시작합니다.

튀르고 프랑스 경제학자(1727년5월10일~1781년 3월18일)

 

당연히 기득권이 귀족들이 반발하고 왕실의 지출까지 일일이 검사받자 루이16세와

마리앙뜨와네트조차 튀르고를 싫어하게됩니다. 이이 튀르고는 사임하고 튀르고가 그토록

반대하던 미국 독립전쟁에 엄청난 돈을 빌려주면서 프랑스의 재정문제는 끝장나 버립니다.

 

엄친데 덮친격으로 이때 최악의 흉년이 들자 아사자가 속출하며

프랑스 시민들이 제발 빵좀달라고 외칩니다.

 

이에 루이16세도 도저히 안될거같아 세금을 더 걷기로합니다.

당시 프랑스는 전체인구의 2%밖에 안되는 귀족과 성직자는 세금을 안냈습니다.

하지만 전체땅의 대부분은 이 2%가 가지고 있었구요.

삼부회

루이16세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위해서 성직자,귀족,평민대표들과 토론회를 하려고합니다.

당시 프랑스는 국민들을 1부 성직자,2부 귀족,3부 평민으로 나눠서

백성이 제일 밑에계급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토론회를 '삼부회'라고 불립니다.

이때 논란은 쪽수대로 투표할지 그룹별로 투표할지 였습니다.

당연히 쪽수대로하면 평민이 이기고 그룹별로하면 성직자와 귀족들에게 2대1로 평민들은 질겁니다.

테니스코트의 선서

귀족들이 왕을 협박하자 루이16세가 기득권들의 편을들고 이에 

격분한 평민들은 귀족과 성직자를 제외한 루이16세만 옆에있던 

테니스코트로 데리고옵니다.

'테니스코트의 선서' 다비드작

 

그리고 테니스코트장에서 우리끼리 회의를 하겠다며 국민회의라는걸 만듭니다.

또한 여기서 입법활동을하고 새로운 개헌안을 받아들일것을 루이16세에게 압박합니다.

그래서 여러가지 법안을 제시하는데 루이16세는 다 거부합니다.

그는 귀족들과 성직자에겐 약하면서 평민들에겐 강하게 나갔네요.

말그대로 루이16세가 계속해서 거부권을 남발합니다.

 

이에 대규모의 평민들(주로 굶고있는 아이들을가진 엄마들)이 베르사유궁전으로 쳐들어옵니다.

수만명이 몰려오자 쫄은 루이16세는 겁을 잔뜩먹고 마리앙뜨와네트에게 

어떻게 하면 좋게냐고 물어보고 마리앙뜨와네트가 해외로 튑시다!라고 합니다.

 

오스트리아까지만 가면 우리는 살수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마리앙뜨와네트의 고향이 오스트리아이기 때문입니다.

루이16세와 마리앙뜨와네트는 하인복장을 하고 오스트리아 국경까지 가는데요.

너무 힘들어서 좀 쉬기위해 오두막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 우체국국장이 오두막으로 들어가는 그들을 발견하고 그들은 파리로 압송됩니다.

당시 프랑스 지폐에는 루이16세 얼굴이 찍혀있었기 때문에 우체국국장이 그들을 알아볼수 있었던겁니다.

루이16세는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지폐로인해 잡히는데 아이러니이네요.

이렇게해서 루이16세랑 마리앙뜨와네트는 단두대에서 목이 날라가는데요.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는 루이16세

 

루이16세는 부르봉왕가의 마지막 왕이기도 합니다.

극좌파 '자코뱅파'의 등장 / 공포정치의 신호탄

루이16세가 죽고 자코뱅파라는 지금으로 따지면 급진 좌파가 집권을합니다.

하지만 이들도 권력을잡자 시민보단 자신의 권력을위해 공포정치를 시작합니다.

자기들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다 죽여버립니다. 

마라의죽음

전직의사였던 '마라'가 급진좌파의 수장이되고 그 또한 공포정치를 이어갑니다.

이에 도저히 참다못한 우파소속의 젊은 여성 샤를로트 코르데라는 여성이 마라의 보호를 

받고싶다는 구실로 마라의 허락을받고 그의 집에 들어와 욕조 속에있던 그를 칼로 찔러 죽입니다.

'마라의죽음' 다비드작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마라는 죽었지만 1790년에 자코뱅파의 당수가된  변호사출신 '로베스피에르'가 있었습니다.

왕과 왕비까지 죽인 그에게 무서운건 없었습니다.

혁명가였지만 권력에 맛을본 그는 미치광이로 변했습니다.

 

공포정치기간중 30만명 가까이가 죽고 심지어 갓난 아이도 목을 쳤습니다.

로베스피에르(1741~1803)

프랑스 국민들은 늘어만가는 처형에 환멸을 느끼고 파리에서는 

공안위원회 위원이자 공포정치의 지도자인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음모가 진행중이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테르미도르 9일 반기를 든 국민공회 의원들에의해 잡히고 단두대에서 처형당합니다.

테르미도르 반동(프랑스 대혁명 기간중 혁명력 제2년 테르미도르 9일에 시작된 반란)

 

프랑스대혁명 기간동안 수십만명이죽고 갓난 아이도 단두대로 목이 날아가고 하니까

프랑스 시민들은 혁명이고 나발이고 민주주의 필요없다. 절대권력으로 나라를 안정시켜달라!는

목소리가 커져갔습니다.

무력이 아닌 국민들의 압독적지지로 '나폴레옹' 황제에 오르다

이에 나폴레옹은 1804년 국민투표 90%가 넘는 압도적인 시민들의 지지로 황제에 선출됩니다.

나폴레옹 대관식 , 다비드 작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 다비드 작

루이16세부터 나폴레옹시대까지 살면서 '다비드' 화가는 주요작품들을 그리는데요.

테니스코트의 선서와 '마라의죽음'에서 좌파인 마라의 죽음을 미화한 그림등을 볼때

그는 진보적인 예술인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너무나도 잘아는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이란 작품에선 

나폴레옹을 미화해서 변절자란 말을 지금은 듣고 있습니다.

실제 나폴레옹이 당나귀를타고 알프스를 넘던모습
자화상(1794), 다비드(1748~1825)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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