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분들이라면 영화'지슬'을 거의다 봤을겁니다.
지슬이란 영화는 제주4.3사건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중 정말 획기적으로 잘 만든 작품인데요.
4.3사태가 해방후 47년3월1일 관덕정에서 경찰에의해 발포가돼서
시민 6명이 죽어 바로 한달후 4.3사건이 일어났나보다 막연히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듯합니다.
4.3사태는 관덕정발포사건후 1년정도후인 48년도에 일어나는데요
48년이면 해방후인데 왜 한국인들끼리 악마처럼 죽이고 죽이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났을까요?
이걸 알기위해서는 45년 해방후 한국의 정치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945년 해방후 한국의 정치상황
45년 해방후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지만 대한민국 사람들 모두가 기뻐했던건 아닙니다.
똥줄타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바로 일본에 빌붙어 살던 수많은 사람들입니다.
여운형선생은 해방이 될거라는걸 미리예측하고 해방 1년전 미리 건국동맹이라는걸 만들고 독립후를 준비합니다.
8월15일 해방되자마자 건국준비위원회라고 건준위도 만들구요.
또한 자치통치를 위한 인민위원회라는 조직을 8월말까지 전국에 145개를 결성합니다.
이에반해 지주 아들이라던가 유학을 갔다 온 사람들 그야말로 일본밑에서 권세를 누렸던
송진우,김성수등은 숨죽이고 관망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한국의 상황에서 미군의 맥아더는 일본을 점령해서 동경에 있었고 오키나와에 있던
하지한테 자신이 한국에 갈수없으니 한국으로 가라고 명령하고 하지는 1945년 9월8일 한국에 들어옵니다.
비극의시작 영어, 이를 눈치챈 유학파 조병옥과 친일파들의 빠른 움직임
이 사실을알고 여운형도 빠르게 대비합니다.
9월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성립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기관으로서 미군정을 맞이할 준비를 갖춥니다.
하지만 미군은 한국이 스스로 자치할만큼 성숙되지못한 미개한 나라로 인식하고 9월8일부터 미군정이
한국을 통치하는데 모든 비극은 영어에서 시작됩니다.
그 시기는 누가 미군정한테 잘보이냐? 즉 영어만 잘하면 권세를 누릴수 있었고
영어는 막강한 권력이었습니다.
조병옥등 유학파들과 친일파들이 미군정대표 하지에게 가서
한국은 이미 인민공화국이 다 점령했고 이들은 다 빨갱이다라고 거짓선동을 합니다.
인민이라는 말이 지금에서 볼땐 북한에서만 쓰는말 같지만 그 당시로서는 국민을 칭하는 최고의 말이었습니다.
이런 분열탓에 결국 9월8일 중앙청에는 일장기가 내려가고 태극기가 올라가는대신
성조기가 올라갑니다.
왜냐하면 한국을 미국은 자신의 우방이 아니라 일본국가의 일부로서 해방후 공산세력이
판치는 미국의 적국취급을 합니다.
그래서 해방의 기쁨도잠시 한국의 주요기관들의 주요 요직을 미군정의 미 군인들이 거의다 차지하고
미군정은 좀더 효율적으로 통치하기위해 일제강점기 경찰로 다시 채웁니다.
군대도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사람들을 등용합니다.
일본군대훈련을 철저히 받은 박정희,백선엽,정일권
이 기라성같은 만주군관학교출신들로 채워지니
해방후 한달 후에 모든 국가체제가 다시 일제시대로 간거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해방의 기쁨은 딱 한달이었던겁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1946년 2월경이면 여운형이 조직했던 인민위원회도 다 와해되고
오로지 제주도 인민위원회 하나만 1947년 3월1일 복국민학교에서 대규모 집회를
할만큼 완벽하게 건제합니다.
제주도 시민들의 미군정에의한 통치가아닌 완벽한 독립으로서의
하나된 조선에대한 갈망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알수있습니다.
제주도 비극의 시작,1947년 3월1일 집회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미군정에 항의차 자신들이 건재하다는걸 과시하기위해
1947년 3월1일 대규모 집회를 열었는데 여기서 그만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밟혀 사망하고
경찰의 사과를 받기위해 항의차원에서 행진중 수많은 관중들에놀란 조선의 경찰들은
관덕정근처에서 발포를하고 이로인해 시민 6명이 죽게됩니다.
그당시 경무부장 조병옥은 정당방위라며 사과를 거부합니다.
오히려 조병옥은 48년 5월10일에 이뤄질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방해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라며 이념논쟁으로 몰아갑니다.
이승만또한 48년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영향을 받을까 노심초사중 조병옥을 뒤에서 조종했습니다.
이에 성난 제주도민들의 95% 즉,제주도 경찰이나 공무원할거없이 제주도민 거의다가
일치단결해서 총 파업을 통해서 이승만정권에 저항합니다.
이 사건후 이승만권력은 거의 1년동안 제주시민 2,500명 정도를 학살까지는 아니지만 구타하고 고문을통해서
제주시민들에 더 큰 핍박을 가합니다.
서북청년단의 등장
1947년3월1일 제주도에서의 대규모집회는 1948년도까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통해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이승만에겐 굉장한 불안요소 였고 제주도를 제압하기위해
서북청년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요. 서북청년단이 나타나면서 같은 동족끼리
죽고죽이는 비극이 더욱더 심하게 이루어집니다.
북한쪽에서는 남한과달리 46년도부터 토지개혁을 착착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따라 조선토지개혁에 관한법령을 세우고
모든 땅을 경작하는 사람에게 평균 15마지기정도씩 다 나누어주는 토지개혁을 실시합니다.
이에 황해도,평안도 서북지역에서 땅을 빼앗긴 많은 사람들이 공산당에 원한을 품고 남한지역으로
내려오는데요.
원한으로 가득찬 이들을 이승만은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서북청년단이라고 이름을 붙인후 이승만은 이들에게 엄청난 이권을 주었지만
그대신 이들에게 월급을 주지않았습니다.
알아서 약탈해서 살도록 했습니다.
이들의 적개심을 이용하고 부추긴겁니다.
공산당에 적개심과 원한을 가진 서북청년단을 제주도로 보내면서 이 서북청년단은
이승만의 사주대로 아무런 이념적 논리가없더 무고한 제주시민들을 공산당으로 몰아가며
같은 동포들끼리 죽이는 엄청난 비극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모든 뒤에서의 사주는 물론 이승만이구요.
결국 제주4.3사태 일어나다
이렇게 사태가 점점 악화되던중 1948년 3월 중학교를 다니던 김용철군이 고문을받다 죽게되고
모슬포지서에서 양은하라는 청년도 고문치사를 당합니다.
이에 참다참다 도저히 안되겠다 생각한 사람들 300여명이 김달삼을 중심으로
1948년 4월3일 무장을하고 제주도 24개 경찰지서중에서 12개지서를 습격합니다.
이게 그유명한 4.3사태의 시작입니다.
4.3사태는 그냥 화나서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제주도에대한 미군정,이승만,서북청년단등 위에서 말하지않은 그들의 수많은 만행에대해
제주도민들이 참다참다 도저히 참을수 없으니까 어쩔수없이 일어난
미군정과 이승만에대한 제주도민들의 항거였습니다.
4.3사태 후는 다음시간에 포스팅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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