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제주 4.3사태 확실히 이해하자(2) / 4.3사태 발생 그 이후

by 언빈 2024. 9. 27.
반응형

관덕정 발포사건(1947년3월1)이 제주4.3사태의 기폭제가 된건 맞지만 

제주 4.3사태가 단지 경찰의 관덕정 발포사건때문에  제주시민들이  갑자기 일으킨 사건은 아닙니다.

제주 관덕정앞 집회

 

그 당시 제주도에선 중간상인들의 쌀 매점매석으로 쌀값이 폭등했고

그런데도 미군정은 쌀값이 폭등하니 제주도민에게 쌀5천석을 더 내놓으라고 합니다.

이에 제주도민들은 미군에 쌀을 시중가의 거의 5분1에 빼앗기다 시피합니다.

 

 

제주도민들은 쌀을 제값에 팔지도못하는데도 중간상인들의 창고엔 쌀이 남아돌아 썩어가고

그런데도 제주도민들은 쌀이없어  기아에 굶어죽고 또한 서북청년단등의 만행과 악행으로 도저히 

살수가 없었습니다.

서북청년단의 만행을보고 피카소가 그린 그림

 

이에 참다참다 도저히 참을수 없어서 김달삼이 중심이되서 300여명이 무장을하고

제주도의 24개 경찰지서중 12개 지서를 무력습합니다.

이것이 제주4.3사태의 시작입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꿂틀될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주4.3사태가 일어난 좀 더 자세한 배경에대해선 '제주 4.3사태 확실히 이해하자(1)' 포스팅을 보시고오심 더 좋을거 같습니다)

(이번 포스팅은 4.3사태 발생후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는지 큼직한 사건들을 위주로 포스팅 하겠습니다^^)

제주4.3사태 그 후의 비극

이승만

제주4.3사태가 발생하자 이승만 올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남한만의 단독선건를 앞둔 이승만은 제주도를 그냥 놔둘수 없었습니다.

제주도를 빨갱이섬으로 몰아부치고 무자비한 탄압을 시작합니다.

서북청년단을 격려하러온 이승만

 

제주도에있던 9연대를 시켜 제주도민들에대한 토벌을 명령하는데요.

토벌은 진압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진압은 인명피해가 없지만 토벌은 보는대로

쏴죽이라는 학살과 같은 의미입니다.

김익렬

이에 9연대장이었던 '김익렬' "우리 군대가 같은 자국민을 어떻게 토벌하냐? 이건 말도안된다!"

토벌에대해서 반대합니다.

그런후 1948년 4월28일 평화회담을위해 김익렬은 김달삼을 직접 만납니다.

당시 9연대장 김익렬

만나서 "내가 너희들의 신원에대한 안전을 보장하겠다.  내말을 못믿겠다면 우리 가족을 

볼모로 삼아도 좋다"라며 진정성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김익렬은 사태를 무력대 무력이아닌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합의까지 이릅니다.

조병옥

그런데 당시 경찰 경무부장이었던 조병옥이 갑자기 제주도로 내려옵니다.

당시 조병옥 경무부장

 

그리고 1948년 5.5일 '4.3진압을위한 최고수뇌부회의'에서 김익렬에게

"너는 김달삼과 일본에서 같은 육군간부후보생이며 한패거리다!"

"너의 아버지는 공산주의자라며" 근거없는 막말을 지껄이자 

김익렬이 먼저 조병옥을 향해서 육탄전을 벌입니다.

이에 미군정은 김익렬을 9연대장에서 해임시키고 여수14연대 연대장으로 보내 버립니다.

4.3진압을위해 만난 최고수뇌부인사들

박진경

9연대자에서 해임된 김익렬의 후임으로 박진경이 오는데요. 

박진경은 연대장취임사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제주도라는 땅이다. 제주 인민 30만명을 싹쓸어 죽여도 

아무 상관없다"라는 말을 내뱉습니다.

동그라미안 박진경 당시 11연대장

그리고 그가 취임후 한달여만에 제주도민 5천명을 검거하고 고문을했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박진경은 바로 소령에서 대령으로 진급합니다.

이에 박진경은 축하의 의미로 술파티를 열고 술에 곯아 떨어져 잠을자는데

술시중을들던 문상길중위와 손선호하사는 곯아 떨어져 잠자고있는 박진경을 총으로 쏴 죽입니다.

박진경 장례식

 

문상길중위는 법정최후진술에서

"나는 저 하나님이 계신 저곳으로 갑니다. 당신도 올 것이고 박진경 나의 상관도 같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이 불공평한 인간의 재판을 받지않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당당한 재판을

다시 받게 될 겁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문상길중위, 곽재환작

 

그 당시 문상길중위는 나이22살, 손선호하사는 20살의 꽃다운 나이였습니다.

이둘의 희생에 오히려 이승만은 군에도 빨갱이가 많다며 

군대의 빨갱이 숙청작업 '숙군'을 시작합니다.

이에 군에서 자그마치 만명이상이 죽임을 당하는등 퇴출됩니다.

숙청당한 인물한명중 한명이 박정희입니다.

송요찬

제주를 시찰한 경비대 총참모장 정일권(맨오른쪽), 맨왼쪽이 9연대장 송요찬
송요찬

숙군의 열풍와중에 1948년 10월17일 새로운 9연대장 송요찬"해안가에서

5km 중산간지대로 들어간있는 놈들은 무조건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때 3만명 가까이가 죽고 특히 그당시 13세이하 아이, 노인들중 70%이상이 희생됐다고 합니다.

61년도 윤보선을 만난 박정희와 송요찬

 

제주4.3사태후 사건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자와 상대를 빨갱이로 몰아 학살하려는자들의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습니다.

중요한것은 제주4.3사태는 어떠한 무장대의 즉흥적으로 생겨난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주 4.3사태의 근본은 너무나도 복합적인 해방이후의 한국의 정치상황과 특히 

이승만의 무도하고 폭력적인 깡패정권과 당시 조선을 미개인 취급한 미군정에대한

전체적인 문제의식 속에서 일어난 사태가아닌 민중들의 항쟁이었다는게 핵심입니다.

 

일본이라는 악질외세에서 드디어 벗어나 우리가 독립적으로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는데 미국과 미국을 이용해 국민보단 자신들의 권력욕에만

사로잡혀있던 이승만정권에대한 제주도민 민중들의 처절한 울부짖음 이었던겁니다.

 

하지만 그 울부짖음은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음에도

지금까지 실현되지 않았다는게 현실입니다.

반응형

댓글